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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 현대 사회와 가치 안녕하세요. 저는 본 수업을 청강하는 학생입니다. 어제 열람실에서 혼자 생각하면서 종이에 끄적거려 본 내용을 카페에 올릴까말까 생각하다가 청강생이라도 지켜야 할 룰은 따라야 하고 어차피 생각한 내용이 많아서 수업시간에 다 말하기도 힘들 거 같아서 이렇게 올립니다. 많은 반론을 바랍니다. 부득이 자유게시판에... 동물의 도덕적 지위 -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모든 사회적 가치문제를 논할 때에는, 논의를 위한 전제와 그와 통하는 단어의 의미 파악과 합의가 필수적입니다. 우선 이 문제를 논하기 위해 어떤 윤리적 관점에서 접근할 것인가의 문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수업시간에 언급되었던 대로 ‘윤리’에 대한 관점은 ‘공리주의’와 ‘칸트주의’ 혹은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는 설(합의주의라고 이름붙여도 되나요?) 등이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 자체를 제기하게 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당한 장치로 공리주의적 관점,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최선(最善)이라고 보는 관점에서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이 문제의 ‘도덕’이라는 용어의 의미도 마찬가지로 공리주의적 의미로 적용하기로 합니다. 다만, 당연하면서도 이 논의의 한계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도덕적 가치가 전적으로 인간에 의한다는 것입니다. 논의도 적용도 인간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럼 ‘동물’이라는 용어를 봅시다. 물론 그 사전적 의미를 모르시는 분은 최소한 우리 수업의 수강자 안에는 없겠지요. 문제는 인간과 대비 혹은 비교되는 상대자로서 ‘동물’은 너무 추상적이고 광범위하여 논의의 범위 등을 흐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즈음에서 우리가 왜 이 논의를 하게 되었는지를 따져봅시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동물의 고통 정도에 의해 그 관련된 어떤 행위가 옳지 않은 것이 될 수 있다는 문제 제기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동물의 그 고통에 대한 반대급부는 무엇입니까? 바로 인간의 행복(‘쾌락’이라는 용어 대신 쓰겠습니다.)입니다. 인간이 동물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고통과 행복의 크기는 달라질 것입니다. 즉, ‘동물’은 이 논의를 위해 ‘인간의 필요’에 의한 분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각 범주의 동물들의 도덕적 ‘지위’가 틀려질 것으로 보입니다. 이 논지를 설명하는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지난 수업시간에도 많은 분들이 ‘육식’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가끔 언론에 등장하는 소위 ‘정력 해외여행’을 떠나 곰이나 뱀 등을 자기 보신을 위해 살육한 부끄러운 한국 남성들의 모습이 보이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들이 ‘옳지 않다’라고 생각합니다. ‘동물’이라는 한 범주가 아닌 분류에 의한 재구성이 필요하다는 말에 동의하시겠습니까? 이제 논의를 위해 인간의 필요에 따라서 동물의 분류를 해 봅시다. 너무나 다양한 구분이 가능하겠지만 대표적으로 식용 / 실험용 / 애완용 / 약용 / 보신용 등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인간의 개발과 생태계의 파괴에 대한 문제도 넓은 의미에서 포함시킬 수 있겠습니다. 이 구분된 범주에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선 확실히 동물의 희생이 더 큰 행복을 줄 수 있는 경우는 무엇일까요? 단연 ‘실험용 동물’입니다.(앞으로 뒤에 ‘동물’이라는 단어는 생략하겠습니다.) 몇몇 동물들의 희생으로 훨씬 더 많은 동물과 인간을 치료하고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약용’ 역시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그 동물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보다 사람이 살아남으로 인한 행복이 더 크다고 본 것이고, 더 나아가 그 사람이 더 많은 이들의 행복에 관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다만 수혜자는 극히 적은데 희생되는 동물의 수는 매우 많을 경우는 재고(再考)의 여지가 있겠습니다. 반대의 경우 즉, 확실히 옳지 않다고 볼 수 있는 경우는 아무래도 ‘보신용’이 되겠습니다. 생존과 직결되는 연관이 없고 대체가능하며 꼭 필요치 않은 행복을 위해 많은 동물의 죽음과 고통을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지요. 앞서 언급한 ‘정력 여행’이 좋은 예가 되겠습니다. ‘식용’과 ‘애완용’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범주인 듯 합니다. 식용, 즉 육식의 경우 먼저 확인할 것은, ‘대체 가능한가’ 즉 그 행위를 하지 않아도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가입니다. 만약 ‘반드시’ 육식을 해야 인간이 살 수 있다면, 이 문제는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잡식성으로 채식으로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일단 육식을 하지 않아도 생존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여기서 “동물세계의 육식”을 논거로 주장하는 반론에 대한 재반론이 가능해 집니다. 인간과는 달리 육식동물은 육식을 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럼 육식을 할 경우 어떤 이득(행복)이 주어질까요. 인간은 육식을 통해 단백질 · 지방 등의 영양소를 공급받습니다. 또한 그로 인해 많은 육체적 활동(노동 등)이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맛’ 등의 부차적 행복은 논의의 가치가 없다고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렇다면 육식으로 인한 손실(고통)은? 우선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동물이 죽어야 합니다. 또한 사육에 드는 비용과 목초 등 식물의 소비가 훨씬 더 많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소의 수는 약 12억 8천 마리 정도로 추산되고, 사육면적은 전세계 토지의 24%를 차지한다고 합니다(단지 소의 사례만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수억 명을 넉넉히 먹여 살릴 만한 양의 곡식을 먹어치우고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상 곳곳에서 굶어 죽어가는 빈민들이 엄청나게 있다는 사실은 다 아시겠지요. 여기서 “육식을 대신한 채식은 어차피 식물의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의 재반론을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그 가축들도 많은 경우 사육 과정에서 비인도적인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결국 어떤 측면에서나(심지어 인간세계 안에서 생각해도) 육식을 금하는 것이 공리주의적으로 옳습니다. 애완용은 애매한 측면이 있습니다. 일단 예외적인 면 - 동물의 소음 등으로 인한 주위 사람들의 피해, 동물의 성대 · 성기 제거 등의 행위, 기타 가학적 행위 등 -을 제외하고는 애완동물이 과연 고통을 느끼는가, 느낀다면 얼마나 느끼는가를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자유를 억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반면에, 먹을 것 걱정 없고 편하게 살 수 있어서 오히려 행복하다고 느낄 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이로 인한 인간의 행복은 확실합니다. 따라서 애완용은 확신을 갖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옳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확장된 형태의 동물원도 마찬가지겠습니다. 하지만 언급했던 예외적인 면은 결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한국정부도 이제 그를 인식하여 애완동물을 학대로부터 보호하는 법안을 만든 것이겠지요. 덧붙여, 이 문제의 확장된 형태로 ‘인간의 개발과 그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앞선 다른 범주와는 달리 일반화하여 평가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동 · 식물 등 고통의 피해자도 다수이며, 개발로 인한 행복의 수혜자, 즉 인간도 다수입니다. 각자가 얼마나 고통을 받고 행복을 얻는지도 각각의 건마다 다 틀립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각 실제 사례에 맞는 가치판단이 필요할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새만금 사업은 몇 년 간에 걸쳐 논란이 되고 있고, 방조제 건설이 거의 끝나가는 지금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다만, 개발이 필요불가결하다면, 최대한 친환경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상의 논지를 한 결론으로 정리하는 것이 유의미한지는 잘 모르겠군요. 굳이 정리하자면 동물의 도덕적 지위는 있어야 하며, 다만 그것이 상황에 따라 다른 적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 논지에 치명적이게도, 저는 계속 육식을 할 것 같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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